
거기 연인이 있는 걸 모르고 사람들이 지나간다. 해가 저물고 있으므로 모두 동쪽을 향해 간다. 서쪽으로 나아가면 숲은 하염없이 깊어지고 동쪽으로 나아가면 어김없이 도시로 회귀한다. 동일한 방향으로 그림자가 고요히 따라붙는다. 그들은 하나같이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걸음을 서두른다. 자칫하다간 숲에 남겨질지도 모르기에 간절해진다. (후략)
-「한 폭의 빛」 중에서.
요람 속 이불을 덮은 아이를 돌보는 여자, 그 여자를 찾아오는 어머니, 마지막으로 숲의 끝에서 검은 모포를 두르고 서 있는 사내. 김수온의 첫 소설집의 표제작 「한 폭의 빛에서는」 서로 다른 세 장면이 겹쳐져 있다.
아이는 흔적으로 발견되지만, 실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어머니조차 아이가 머무는 방에 들어서기를 머뭇댄다. 곳곳의 기척으로만 남은 세계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기보다 기척의 주위를 서성대는 인물들의 모습은 “들어가도 됩니까. /들어가면 안 됩니까.”라며 반복되게 허락을 구하는 사내의 대사와 상징적으로 겹쳐진다.
소설집 “한 폭의 빛”에는 등단작 ‘( )’를 포함한 9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동생의 실종 이후 가족들의 눈 앞에 계속해서 빈 괄호가 등장한다는 가정을 전제한 소설 ‘( )’는 애도의 정서를 스며드는 수채화와 같은 이미지로 구현해낸 작품이다.
이번 작품집에서 김수온은 여자, 아이, 햇빛, 도시, 물, 먼지 등 반복되는 소재를 바탕으로 잊힌 과거를 겹겹이 쌓아 올리는 일에 몰두한다. 여기서 작가는 지난날의 재현이나 복구로 과거를 그리는 대신, 소설 곳곳의 기척을 통해 그 빈자리를 증명할 뿐이다.
빈 과거의 흔적들에 묶인 채로도 소설 속 화자들은 계속되어 진행되는 현재를 살아간다. 소설은 동시에 과거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현재라는 시차 사이 앞으로 나아가는 삶이란 무엇인지, 지난날을 짊어지고 계속해서 정면을 향해 살아간다는 것이 무언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이불은 여자의 몸 언저리에 축 늘어진다. 방금까지 이불을 쥐고 있던 것이 흔적도 없이 말끔히 사라지고 눈앞엔 텅 빈 허공만이 남아있다. 다만 이불 끝자락에 살짝 주름이 져 있을 뿐이다.
달아나버렸어.
단지 뒤를 돌아보아서.
-「한 겹의 어둠이 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