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일상이 시가 되는 순간, 강회진 시인의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
[인터뷰] 일상이 시가 되는 순간, 강회진 시인의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
  • 이승석
  • 승인 2022.08.10 22:10
  • 댓글 0
  • 조회수 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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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때로 극적이고 강렬하지만 대부분의 순간은 평범하고 따분한 일상의 시간으로 가득 차 있다. 냉정하게 보자면 삶은 대체로 우리에게 고통과 인내를 강요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기꺼이 삶을 살아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회진 시인은 우리의 그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 시로 기록하고 있다.
 
꽃 피운 나무 한 그루
혹은 꽃 피운 한 그루 나무에 대해 생각한다
이 마음 저 먼 꽃에게 가 닿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뭐하나, 꽃은 지고 마는 것을
그러면 또 어떠한가,
그 자리 다시 꽃 피울 것을
그러면 또 어떠한가,
한때 꽃이 피었다는 것을
-시인의 말
 
표제작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에서 시인은 30년 동안 길렀던 버드나무가 팔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그래서 저는 매번 지고 말아요/팔랑이던 초록 버드나무 잎사귀처럼/상냥했던 인생은 이제 바빌론 강가에서나 만날 수 있어요”라며 삶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는 듯한 말을 한다. 하지만 시의 마지막에서는 한 가수의 노래를 밤새 들으며 “혼자인 게 더 나을 것 같다고/하지만 혼자이고 싶지 않다고”라면서 가수의 노래에 위안을 모습을 보여준다.
 
훅훅 나무가 우는 밤이면 떠오르는 시절 하나,
다섯 살 무렵 외양간에 들어가
뽀얀 송아지처럼 훅훅,
어미 소의 젖을 빨아 먹던
빨간 기억
-‘부엉이와 빨간 기억’ 중
 
시인은 이렇듯 일상적이고 평범한 우리 주변의 풍경에서 시적 순간을 포착한다. 안상학 시인은 강회진 시인의 시를 “얼음장이 봄으로 흘러가는 물을 내장하고 있듯이 그의 시도 그리움과 기다림을 앞장세우고 절망의 반대쪽으로 흘러가는 간곡한 마음의 결을 암장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강회진의 시를 읽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다.
 
아래는 강회진 시인과의 인터뷰다.

시인께서는 도시의 바쁜 삶보다는 자연과 시골의 느긋한 풍경에 더 매력을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시인님의 시를 읽다 보면 시골의 소박한 생활이 머릿속에서 그려지기도 하는데요, 자연의 어떤 특성이 시인님의 마음을 붙잡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충청도의 산골에서 자랐습니다. 눈이 많이 내린 이른 아침, 방문을 열었는데 마당 한 켠에 서서 저를 바라보던 어린 고라니의 순한 눈빛을 여전히, 기억합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수많은 나무와 풀의 이름을 배우고 농작물을 키우는 마음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어느날, 제 몸의 파동은 늘 어린 시절 고향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아무도 모르는 남도의 소읍에 아주 작은 집을 마련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없이 지내야만 하는 도시에서의 삶은 늘 피로하고 고단했습니다. 그 중 견디기 힘든 층간소음과 도시의 소음으로 귀가 자주 아팠습니다. 귀가 아프니 마음도 아팠습니다.
소읍으로 이사를 한 여름 밤, 멀리 산 쪽에서 소쩍새 우는 소리를 듣고는 서늘한 기쁨에 눈물을 흘린 날이 있습니다. 바로 고향에서 듣던 그 소쩍새 소리였습니다.
이사한 집 마당에는 커다란 고인돌이 있습니다. 참새들이 내려와 제가 놓아 둔 쌀알을 나눠먹고 물을 먹고 놀다 갑니다. 참새들의 지저귐에 눈을 뜨는 아침이 좋습니다.
소쩍새 울음소리와 마당의 고인돌의 힘으로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 라는 시집을 엮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5촌2도의 생활을 하며 서툴지만 자연을 읽는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자연은 정직합니다. 그 정직함을 고요하게 들여다보고 살피고 깨닫고 기록하는 일상이 행복합니다.

‘중간에서 만나자는 말’에서는 만나고 싶으나 만나지 못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시인님께서는 인생에 대해서 ‘견디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는데요, 삶이 왜 이렇게 힘들고, 사람들과의 만남이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시인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중간에서 만나자는 말」 시는 조선시대 세시풍속의 하나인 ‘반보기’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반보기란 양가집의 중간 위치에서 만난다. 혹은 하루의 절반나절만 만난다는 뜻에서 기인합니다. 예전에는 여성이 시집가면 출가외인이라 하며 친정부모를 쉽게 만날 수 없었지요. 그래서 반보기라는 세시풍속이 생겨났는데요, 물론 이것은 여자들의 외출을 삼갔던 유교봉건사회의 구조에서 행해진 것이며 여성을 비하하던 낡은 풍습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요.
저는 여기에서 온전한 만남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또한 거리, 중간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했는데요, 도대체 중간이라는 지점은 어디쯤일까요? 가늠할 수 없는, 지도에도 없는 중간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앞서 이야기 했지만 제가 소읍으로 이사를 한 후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왜 그렇게 먼 곳으로 갔느냐?”였습니다. 그 질문을 받을 때 마다 저는 뭐라 답을 해야 할 지 고민을 했습니다. 왜냐면 도대체 어디를 기준으로 멀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기준으로 먼 곳이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직장’을 중심으로 먼 곳과 가까운 곳을 결정하는 것인가? 아니, 다들 각자 자신을 기준으로 “먼 곳과 가까운 곳”을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먼 곳도 가까운 곳도 없습니다. 그러니 중간이라는 말도 없지요. 거리의 문제는 다시 만남의 문제로 이어지는데요, 그렇다면 우리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나아가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누군가와의 만남이 더욱 소중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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