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씨앗을 품는 일
언어의 씨앗을 품는 일
  • 이대흠
  • 승인 2022.11.01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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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199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1997), 『상처가 나를 살린다』(2001), 『물 속의 불』(2007), 『귀가 서럽다』(2010),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2018)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 『청앵』(2007), 『열세 살 동학대장 최동린』(2018) 등이 있다. 연구서로는 『시문학파의 문학세계 연구』(2020), 『시톡1』(2020), 『시톡2』(2020), 『시톡3』(2020) 등이 있으며, 산문집 『그리운 사람은 기차를 타고 온다』(2000), 『이름만 이삐먼 머한다요』(2007), 『탐진강 추억 한 사발 삼천 원』(2016) 등이 있다. 조태일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젊은시인상, 전남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어린 시절에는 언어에 대한 특별한 자각이 없었다. 당연히 부모님이나 형제나 친구들에게서 조금씩 배운 말을 공유하고, 익혀 썼다. 처음 듣는 말에 대해서는 그 사람에게 뜻을 물어 의미를 짐작하였고, 그 말이 내게 익숙해지면 사용하였다. 그 때의 말은 주변 사람들이 쓰는 것이었고, 그들이 쓴 말을 나도 같은 의미로 사용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새로운 말을 접했을 때는 놀랐고, 그것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내 생애 최초의 언어학적 논쟁은 아주 어린 시절에 있었다. 아마 대여섯 살 때였을 것이다. 소꿉놀이를 하려할 때였다. 사촌 여동생이 갑자기 “우리, 까끔살이 하자.” 그랬다. “까끔살이가 뭔지야?” “근다고 까끔살이도 모릉가?” “긍께 그것이 뭐냐고?” 무너져 내린 뒤란 황토 언덕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새로 드러난 흙의 속살은 유독 
붉었다. 내게는 여동생이 뱉은 ‘까끔살이’라는 말이 시뻘건 황토 속에 박혀 있는 흰 돌처럼 두드러져 보였다. 결국 여동생이 말한 ‘까끔살이’가 내가 알고 있는 ‘빠끔살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한참 동안 동생과 나는 어떤 말이 맞느냐를 가지고 말다툼을 하였다. 승패는 나지 않았다. 서로가 알고 있는 말에 대한 믿음이 강하고, 그 말을 가르쳐 준 가족 공동체에 대한 신뢰까지 걸린 문제였으니, 어느 한 쪽도 자기주장을 접지 않았다. “그람, 언니한테 물어보자.” 사촌 동생의 말에 따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사촌 누나에게 어느 말이 맞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사촌 누나도 ‘까끔살이’가 맞다면서, “우리가 흙하고 돌 가지고 노는 것잉께, 까끔(산)에서 살림살이 시늉하고 있는 거 아니냐? 그랑께 까끔살이가 맞제.” 사촌 누나는 나름대로의 근거까지 제시해 가며 ‘까끔살이론’을 펼쳤다. 그러나 그날 처음 알게 된 ‘까끔살이’라는 말은 마을의 다른 아이들에게도 그다지 통용되는 말이 아니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까끔살이’라고도 했다는 아이들이 몇 있었으나, 그 단어를 아예 모르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따라서 ‘까끔살이’라는 사투리는 마을 공동체 내에서도 완전히 소통 가능한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말이 맞느냐보다는 놀이가 더 급했으므로, 서둘러 신랑 각시가 되어 황토 밥에 모래 반찬을 만들었다. 그날 이후 내 머릿속에서 소꿉놀이를 뜻하는 말은, ‘빠끔살이’와 ‘까끔살이’ 두 개가 되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마을 공동체를 벗어나자 다른 말들이 있었다. 내가 살았던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산 너머는 다른 세계였다. 그 다른 세계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에 진학해서였다.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고, 배우고 썼던 말이 문자로 기록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말이 입으로 전해지지 않고, 어떤 형태를 지니고, 그것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경이였으나,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전에 썼던 말이랑 책에서 배운 말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점이었다. 숫자만 해도 ‘한나, 두나, 싯, 닛, 다써, 여서, 닐곱, 야달, 아곱, 녈’로 알고 있었는데, 책에 나온 숫자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이었던 데다가 그것마저 규칙이 동일하지 않아서 일곱이 있으면, 여덥이 있고, 아곱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게 이상했다. 거기다가 그때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대상을 이해하는 건 더욱 어려웠다. 그 중 하나가 ‘공’이었다. 공 비슷한 새끼줄 뭉치나 실뭉치 돼지 오줌보 따위로 ‘축구 차러(축구를 한다고 하지 않고, 축구를 찬다고 했다.)’ 다니기는 했지만, ‘공’은 생소한 물건이었다. 이건 마치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 사는 사람이 컴퓨터를 이해해야 하는 난처함과도 같을 것이다.

하나의 제한된 공동체에 살았던 사람에게 다른 공동체의 언어는 실체가 잘 잡히지 않는다. 표준어를 접하고 나서부터 언어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칭구와 친구, 오강과 요강, 노두다리와 징검다리, 냇갈과 강, 맹갈과 연기, 저닉과 저녁, 아칙과 아침, 정과 점심, 그랑께와 그러니까, 니와 네, 거짓깔과 거짓말, 깔과 꼴, 두엄베늘과 퇴비사, 나락과 벼, 옥쪼시와 옥수수, 소낭구와 소나무, 몸땡이와 몸뚱이, 이녁과 자기, 한애와 할아버지, 함무니와 할머니, 엄니와 어머니, 아부지와 아버지, 끄시랑치와 지렁이 등의 말에는 서로 간에 하나의 얇은 막이 있었다. 인간의 정서나 사고는 언어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내 머릿속에는 전라도 방언으로 이루어진 실제 세계와 표준어로 이루어진 상상 세계가 공존했다. 이 두 세계는 쉽게 합일이 되지 않았고,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제압하지도 못했다.

그러다 언어의 아름다움을 자각한 것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동시를 접하면서였다. ‘인간의 말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인간은 말로 의사소통을 하고, 말로 정보를 축적하고, 전달하고, 말로 법을 만들기도 하지만, 인간의 말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시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때부터 막연하게 시인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은 있었다. ‘표준말은 이렇게도 아름다운데 내가 쓰는 말인 전라도 방언은 아름답지 않구나.’ 그런 생각이었다. ‘송알송알’ ‘졸졸졸’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파란 하늘빛 물이 들지요’ 같은 구절은 표준말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정말 내가 쓰고 있는 사투리는 아름다운 시가 될 수 없을까? 그때부터 의문이 들었다. 물론 그 당시의 내가 시어와 일상어의 차이 같은 것을 알았을 리는 없다. 또한 모든 표준말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표준말을 갈고 닦은 시어가 아름답게 느껴졌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사투리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그것은 영랑의 ‘오매’를 알고 난 후라 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는 내 머릿속의 시는 표준말로만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어머니의 말 중에서 ‘겨울이 다 
되얐능갑다. 노루 꼬랑지 몬양 해가 짜룹다.’와 같은 말은 무언가 멋진 말로 보였지만, 언어의 음악성이나 울림이 표준말로 쓰인 아름다운 시 구절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 무렵의 내게는 시어로써는 전라도 방언이 표준말에 미치지 못하는 말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일상으로 쓰는 말은 시어처럼 감미롭지 않았다. ‘그 사램은 지지벨레 말을 찌클어불듬마.’ ‘베락 청 받어 디질 놈의 새끼.’ ‘헹기뽀은 어따 뒀냐?’ ‘새금파리에 발 찌새분 디는 된장을 볼라사 쓰껏인디.’ ‘뽈깡 인나서 댕게 오제 뭇하냐?’ ‘나락에 멜구가 슬어서 큰 숭한 일 나겄드란 말이오.’ ‘실강에 홍시들이 다 물캐져부렀드라.’ 일상에서 만나는 이런 말들은 거칠고 투박했다. 그런 말이 어떻게 표준말로 된 그 아름다운 시어가 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어린 내 머릿속에는 표준말은 더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말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다.

더군다나 강요된 표준말 정책은 내가 입으로 쓰는 말을 표기하지 못하게 했고, 누구도 그 말을 쓰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러한 두 언어 체계의 괴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편지 대필을 해줄 때였다. 동네 
할머니들이나 아주머니들이 밤이면 편지를 써 달라고 왔는데, 그분들이 하는 말을 양면지에 옮기는 일은 어려웠다.

“낮에 지와몰떡이 펜지 조깐 써돌라고 하드라.”

초등학교 고학년에 이르자 편지를 써달라는 부탁이 제법 들어왔다. 학교에 다녀오면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을 하시곤 했다.

“제게가 쓰제 뭇낫다고 난테 써달라고 한당가. 나 펜지 쓰기 싫은디...”
“눈이 안 뵈잉께 그라제. 펜지 고까튼 것이 무시라고 못 쓴닥 하냐?”
“야튼, 쓰기 싫탕께. 펜지 쓰는 것이 엄마나 에로운지 앙가?”
“에롭기는 무시 에로와야. 핵게를 6년이나 댕겠씀서 고까튼 펜지 한나 못 쓴다먼, 죽어부러사제.” “겁나게 에롭당께 그라네이.”
“아니, 불러준 고대로 쓰먼 되는디 머시 에로와야.”

어머니는 불러 준 그대로 쓴다는 것의 어려움을 알지 못했다. 나 또한 표기의 원칙을 잘 몰랐고, 더군다나 방언의 표기 원칙은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통보를 받은 날 저녁에는 학교 숙제보다 훨씬 어려운 과제가 내게 주어졌다.

“아야. 대흐마이. 서울에 있는 느그 멩석이 성한티 펜지 조까 써 주그라.”

예고된 지와몰아짐의 방문이 있었고, 내 앞에는 양면지 두 장과 편지 봉투 하나와 볼펜이 놓였다.

“무라고 쓰까요?”
“기냥, 니가 알어서 써라.”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알아서 쓰면, 편지 속에서 말하는 사람이 나인지, 지와몰아짐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그라먼 그 펜지가 지가 쓴 것이제, 아짐이 쓴 것이라요?.”
“아따 기냥 멫 자 적어부러야.”
“그래도 내용이 있어사 쓰꺼 아니요? 무담시 펜지를 쓴다요?”
“오메. 성가시구마이. 그람 어찌케 할끄나?”
“글먼 아짐이 말로 불러 주씨요. 그라먼 지가 그 말을 욍게 쓰께라우.”
“그람, 그라고 하자.”
이렇게 시작된 편지 쓰기는 학교에서 친구들의 연애편지를 써 주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멩석아 잘 지내지야?
저번에 보내준 돈은 잘 받었다. 물라고 그라고 큰돈을 보내고 그라냐? 니도 핵게 댕기니라 엄마나 심이 들 꺼신디, 그라고 돈을 헤프게 보내먼 쓴다냐.

이렇게 말 편지를 옮겨 적고 있으면, 난데없이 이런 말이 끼어들었다.
“그랑께 느그 멩석이 성이 돈을 겁나 많이 보냈드란마다.”
동네 아주머니.

“오매. 멩석이가 클때부텀 수말시럽듬마는 차왈로 소자시이.”
어머니.

“성님한티게 자랑할라고 그란 것이 아니라, 멩석이가 차말로 벨시럽단 말이오. 맨당 엄니 몸 우짜요? 엄니 아픈 다리는 괜잖하요? 허리 다친 디는 나섰오? 그랬싼단 말이오. 오매. 우자까. 무단시 눈물이 다 나네이잉.”
아주머니.

“오야. 그란 것이 다 자네 복이시. 얼매나 징상나게 살었능가?”
아주머니.

말을 주고받는 두 분을 보고 있으면, 어떤 내용까지 편지에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대화는 편지 써 주는 일을 재빨리 끝마치고 싶은 내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편지를 쓰겠다고 엎드려 있는 내가 그 대화에 끼어들 틈도 없고, 끼어들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에 대화에서 소외된 나는 심통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에게도 방법은 있었다. 나는 어설픈 지식인 흉내를 내며, 내 능력을 과시하였고, 그것으로 협박을 했다.

“아짐. 그라먼 펜지 안 써도 되지라이?”
“먼 소리다냐? 언능 써사제.”
“아니, 펜지 쓴다고 오세갖고 그라고 지겠응께 그라지라이.”

그래도 두 분의 대화는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지와몰댁은 어머니를 도와 고구마순을 다듬고 있었다. 나는 연필심에 침을 묻혀가며, 지와몰댁이 뱉은 말 중에 어떤 말을 골라 편지로 쓸 것인가에 대해 고심했다.

“아짐. 언능 펜지 쓰시잔께요. 숙제도 해사 쓰고 그란단말이요.”

숙제는 언제든지 무기가 되어 주었다. 피하고 싶은 상황이나 벗어나고 싶은 공간에서 마지막 무기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게 숙제나 공부였다. 마을 어른들이 숙제나 공부라는 말을 맞으면, 거의 나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려던 의지가 무화되었다. 어른들의 항복을 가장 쉽게 받을 수 있는 도구가 숙제였던 셈이다. 그래도 어떤 경우에는 그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요새 농사철이라 바쁜디, 지와몰아짐이 역까장 왔는디, 문 숙제를 한다고 그라냐? 베왔다는 놈이 그러먼 못 쓴다. 숙제사 이따가 하먼 되제.”

마지막 내 수단이 어머니에게 통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더군다나 지식인으로서의 내 양심까지 건드는 날에는 오히려 내가 그 말에 묶일 수밖에 없었다.

“긍께. 언제 지가 안 쓴다고 그랬어요? 언능 쓰자는 말이제.”

“알었다. 얼른 쓰그라.”
지와몰댁.

“무라고 쓰 꺼시오?”
나.

“펜지를 쓰먼 되제. 그냥 느그들은 잘잘잘 쓰고 그라듬마는...”
“긍께, 먼 말이 있어사 쓰제라이.”
“기냥 니가 써부러라.”
“어칳게 그란다요. 할 말이 있응께, 펜지를 쓸 것 아니요. 아짐이 불러만 주씨요. 그람 내가 고 말을 고대로 써불랑께.”
“알었다. 몸땡이나 성하냐? 보고 잪다. 기냥 그란 이약을 써불먼 되제.”
“알었오이. 몸땡이는 성하냐? 엄니는 니가 무쟈게 보고 잪다. 이라고 쓰먼 쓰겄오?”
“하먼, 하먼, 그라먼 되제이.”

그런데 아주머니가 입으로 말하는 것을 글로 표기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몸땡이라는 말 하나만 해도 그랬다. ‘몸땡이, 몸뙹이, 몸뗑이’ 중에서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말이 왜 이렇게 어려운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골머리를 앓고 있으면, “핵게서 배왔응께, 느그들은 솔합게 쓰지야?” 이런 질문이 던져졌다. ‘솔합지 않당께요. 징상나게 머리 아프고, 징그랍게 에롭당께요.’ 입 안을 뱅뱅 도는 이 말을 뱉을 수는 없었지만, 표기의 어려움은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보고 잪다’는 말도 그랬다. ‘보고 자와서, 보고 자퍼서’ 이런 식으로 활용이 되었을 때는 정말이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참 별것 아니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보고 자퍼라, 보고 잪어라, 보고 자와라’의 차이가 무엇인가? 초등학생인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중에 대학에서 음운학을 공부하고 나서야 풀린 의문이었으니, 서툰 지식인이었던 내게는 ‘편지 쓰기’가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순경음비읍을 이해하고, 어근을 밝혀 적는 문제가 왜 나왔는가를 알아야 가능한 일이었으니, 입말을 옮겨 적는 문제는 언어학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무렵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 ‘오래된 편지’이다. 

큰 악으야 에미다 더운 디서 일하니라고 고상이 징상나게 많지야 여그도 이라고 더운디 니는 오죽하겄냐 근디 우째사 쓰꺼나 니 나오먼 통장 한나 둘라고 애끼고 애낀다마는 이참 월급도 아그들 납부금 내불고 농협 빚 조깐 쥐알려불고 낭께 읎어져부렀단마다 차말로 내가 에미제만 할 말이 읎다 더운 나라에서 피땀 흘리고 이쓸 너를 생각하면 중치가 멕히고 숨이 멕힐락 한다마는 우짜겄냐 벨 도리가 읎어분다 못짜리 할 때부텀 울던 속닥새가 또 운 것을 본께로 밤이 이상 짚었는 모냥이다 니가 작년 가슬에 싱게놓고 간 국화도 이상 커부렀다 깽벤 밭에는 감재랑 콩을 싱겠는디 아까 낮에는 아그들 데꼬 가서 밭을 맸다 날이 징상나게 더와서 아그들은 풀 조깐 매고 나서 뫼욕을 하드라 아그들 뫼욕한 거 보고 이씀서 오매 우리 큰악으는 더운 디서 엄마나 고상할끄나 생각허닝께 눈물이 나드라 모쪼록 여그는 암상토 안항께 니 몸 한나 건사 잘하기 바란다 펜지를 쓴다고는 쓰제마는 니 낫을 볼 면모기 읎어서 우짜꺼나 못난 에미가 무담시 우리 큰악으만 고상시키고 있구나 니가 그라고 피땀 흘림서 번 돈을 한나도 모태도 못하고 우짤까 몰르겄다 아그들이 크먼 니 덕을 알랑가는 몰겄다마는

이쯤 쓰고 있노라면 어머니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나는 엄니가 불러준 대로 고대로 써부렀네이 하고는 편지 말미에

큰성 나 대흠인디, 엄니 시방 울고 있소. 큰성 이약만 나오먼 눈물부텀 흘린당께. 모쪼록 몸 성히 잘 지내시고, 나올 때게 샤프펜슬 꼭 잊지 마씨요이잉.

하고 두어 마디 붙이곤 하였는데
- 이대흠, 「오래된 편지」 부분

이 작품을 쓸 때 몇 구절을 쓰면서 머뭇거렸다. 내가 쓰는 전라도 방언은 표준말 표기의 원칙에 따라 ‘어근’을 밝혀 적는다. 그러나 이 작품의 일부는 ‘소리 나는 대로’ 표기를 하였다. 표준어라고 하더라도 소리 나는 대로 표기를 하면 다른 지역의 방언처럼 보인다. 따라서 방언의 효과를 시각적으로 극대화하려면, 소리 나는 대로 적는 게 유리하다. 그러나 방언의 표기 원칙도 있어야 하기에 나의 경우에는 표준어 표기 원칙에 따라 적으려 한다. 이것은 표기에서 분명한 차이가 드러나는데, 예를 든다면 어치케와 어칳게, 보고 잡다와 보고 잪다. 보고 자퍼와 보고 잪어, 이물업씽께와 이물없싱께 등으로 확연히 다르다. 시인이나 작가에 따라 표기 방식에 차이가 있는데, 어떤 방식으로 쓰든지 명확한 자기만의 언어 체계를 유지하면서 쓴다면 별 문제는 없다.

위의 시 「오래된 편지」를 쓸 때는 어떤 부분은 ‘소리 나는 대로’ 표기를 하였고, 어떤 부분은 ‘표준어 표기 원칙’에 따랐다. 모두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서였고, 중학교 1학년생이 쓸 수 있는 표기 원칙이 정확하게 없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등장인물에 생동감을 불어넣기 위한 방법이다. 위 시의 끝부분에 ‘샤프펜슬’이 나온다. 실제 전라도에서는 ‘샤프’라고 발음하지 않고, ‘사프’라고 발음한다. 그러나 중1년생의 어설픈 표준어 따라 쓰기의 심리를 반영하려고 의도적으로 ‘샤프’라고 표기를 했다. 한 편의 시에 구사된 방언은 그러한 점까지 고려하여 표기된다.

말을 문자로 표기하는 원칙을 배우기는 하였지만, 방언을 글로 옮기는 일은 어려웠다. 학교에서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쓴 말을 어떻게 적어야 하는가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 의문이 처음 들었던 것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책을 읽게 된 순간부터였지만, 그것에 대해 답을 해 준 선생은 한 명도 없었다. 처음 그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진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였지만, 서울내기였던 선생은 잘 모르겠다고만 하였다. 2학년 때의 담임은 쓸데없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으며, 3학년 때의 담임은 확고한 표준말 정책의 신봉자라서 칠판 닦기를 내 얼굴에 던지며 화를 내었다. 언어에 대한 나의 질문은 그처럼 두꺼운 벽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나는 방언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서울말만 바른 말이라 강요하는 게 마땅하지 않았으며,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부모님을 비롯하여 동네 어른들이 쓰는 말이 천시 받는 것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까지 시를 쓰면서 전라도 방언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무척이나 고심하기는 했지만, 그 말을 시어로 살려 쓰는 데는 실패를 거듭했다. ‘일상어와 시어의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고, 일상어를 시어로 승화시키는 작업이 시인의 숙명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나는 나의 모어에 대해 구체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선배 시인들의 시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방언을 시로 써서 성공한 작품은 많지 않았다. 모범이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어로 현대시가 가능해진 것이 1930년 무렵부터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나의 이러한 책무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1997년 고향 쪽으로 낙향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태어나고, 살았던 지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그곳의 말에 대해 더 알아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에서 비롯되었다. (이미 다른 책에서 밝혔듯이 내가 전라도로 되돌아온 것은 3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전라도 말에 대한 애정 때문이고, 둘째는 5.18의 현장을 내 발로 밟아보고자 한 것이었고, 셋째는 부모님과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서였다.)

그래서 나는 1997년 전라도 광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리고 그때부터 내가 한 일은 살아있는 말을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매일 나갔다. 곡성으로 구례로 담양으로, 해남으로 강진으로 장흥으로, 여수와 순천, 광양으로 나는 매일 싸돌아다녔다. 물론 내가 준비한 것은 펄떡펄떡 뛰는 말이라는 물고기를 잡을 그물이었다. 그 그물에는 많은 말들이 걸렸다. 그리고 같은 전라도라고 하지만 산 하나 넘으면 달라지는 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전라도 지역도 몇 구역으로 나뉘어 방언의 특성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사투리’와 ‘방언’의 차이를 명확하게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일일이 다 기술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는 분명하게 기억이 난다. 내가 태어난 전라도 장흥, 장동면 만손리에서는 택호를 ‘떡’이라 했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다르게 부르고 있었다. 표준어 ‘댁’이라는 말이, ‘댁'이라 불리는 경우도 있지만, 장흥에서는 ‘떡’이 되었고, 화순에서는 ‘덕’이 된다. 택호라는 말도 ‘댁호’, ‘댁오’ ‘대고’ 등으로 달리 발음하고 있었다.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전라도 말을 배우는 과정은 내 문학 세계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발품을 팔아 언어 속으로 들어가 몇 년을 보냈다. 그러자 드디어 내가 살았던 지역의 언어가 온전히 내 호흡으로 들어왔다. 그 무렵에 쓴 시가 ‘아름다운 위반’이라는 작품이다.

기사 양반! 저짝으로 조깐 돌아서 갑시다 
어칳게 그란다요 뻐스가 머 택신지 아요?
아따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제
쓰잘데기 웂는 소리 하지 마시오
저번챀에 기사는 돌아가듬마는 ……
그 기사가 미쳤능갑소

노인네가 갈수록 눈이 어둡당께
저번챀에도
내가 모셔다드렸는디
-이대흠, 「아름다운 위반」 전문

이 작품은 처음에는 길게 썼다. 할머니와 운전기사의 말 사이에 상당히 긴 분량의 묘사를 집어넣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어색했다. 그래서 발표할 때는 묘사 부분을 완전히 빼 버렸다. 그렇게 표준말로 이루어진 묘사 부분을 빼자 온전히 전라도 방언으로만 된 시가 나왔다. 하지만 이렇게 써도 시라고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발표하고 나자 반응이 좋았다.

그렇지만 방언만으로 시를 쓰는 것은 한 가지 문제점을 동반한다. 아무래도 독자층이 제한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투리 단어를 적절하게 살려서 시어로 쓰는 것과 달리 한 편의 시를 방언만으로 쓰는 것은 조심스러운 점이 있다. 그래서 시를 쓸 때는 어느 정도 조절을 한다. 아예 방언만으로 써서 효과적일 때는 그렇게 하지만, 독자를 염두에 둘 때는 일정 부분을 표준어로 바꾼다. 크게 보면 한국어도 지구의 한 방언이라는 생각이기에 한국의 표준어와 특정 지역의 방언을 섞어서 자유롭게 써 보는 것이다. 아래 ‘늦가을 들녘’의 경우가 그런 예이다.

널펑네 양반 돼지 한 마리 팔고 오는 길에

젤 먼저 국밥집 들러 막걸리 두 되 마시고 현찰로 줘불고
밀린 술값까지 탈탈 털어 쥐알려불고
내친 짐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종재기골 양반네 막걸리 값까지 개러불고
종묘상 들러 고추 모종 값 갚어불고
지물포에 가서 지난 저슬에 샀던 창호지 값 벡지 값 지와불고
지전머리 단골 점방에 가서 묵은 외상값 죽에불고
빚내서 사기는 뭐 했던 손지년 빗 한나 현찰로 사불고
걸레짝이 다 된 마누래 빤스 브라자에 지폐 몇 장 볼라불라다가
크음 하고 돌아서서 방엣간 떡 값 밀린 것 잉끼레불고
농협에 가서 비료 값 꼴랑지 짤라불고
집이 가불라고 차부에 들렀는디 널펑네 처삼촌을 만나불고 나서는 또
이바지로 과일 조깐 사서 앵게 줄 때게 지갑 열어불고
쐬주 두 벵 사 엄버줌서 괴춤 또 풀어불고
슈퍼에 들러 음료수 두 벵 삼서 조만이돈 털어불고
풍로 바람에 검불 날리대끼 다 까묵어불고
마침내 차표 한 장 딸랑 바까서는
빙골로
빙골로 돌아가는 저 늦가을 들녘
-이대흠, 「늦가을 들녘」 전문

이 시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쓴 것인데, 그 하나는 ‘돈을 낸다’는 의미의 전라도식 표현이 참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하나는 ‘빙골로’라는 말의 어감이 좋아 시에 써보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초안을 잡을 때는 시 전체를 전라도 방언으로 썼다. 그런데 막상 읽어 보니, 너무 전라도 방언을 강조하여 자칫 일부 독자가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전라도 방언을 표준어로 바꾸었다. 바뀐 대목은 다음과 같다.

디아지 한 마리 폴고 오는 질에 → 돼지 한 마리 팔고 오는 길에
밀린 술깞까장 → 밀린 술값까지

표준어만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해의 폭을 넓힌 것인데, 전라도 방언의 입말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조금 서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라도 방언만으로도 좋은 시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읽는 독자가 없으면, 시는 설 자리가 없다. 따라서 특정 지역 방언을 바탕으로 시를 쓸 때는 독자에 대한 의식을 더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방언에 대한 애정이 많다고 하더라도, 독자에 대한 배려도 감안해야 한다. 또한 방언으로 시를 쓴다고 하여도, 그 언어를 구사한 작품이 시로서 가치가 없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쓰는 언어를 시적 언어로 다듬을 필요가 있고, 그것이 자신의 모어를 아름답게 만드는 길이지만, 모어를 그저 사용하기만 한다고 해서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방언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언어의 보수성 때문에 방언에는 고어의 흔적이 다소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제사상을 차릴 때, ‘밥’을 ‘메’라 하고, ‘국’을 ‘갱’이라 하였는데, 그 말뜻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국을 가리키는 한자어가 ‘갱’이라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게 알게 되었으나, ‘메’라는 말은 어려웠다. 요즘에는 ‘메’라는 말을 ‘산’이라는 말로 주로 쓰지 않든가. 그런데 제사상에 올리는 ‘밥’과 ‘산’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결국 제사상의 밥을 뜻하는 ‘메’라는 말에 대한 의문은 향가를 공부하면서 풀리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메’라는 말이 백제어 ‘메’와 관련이 있다는 것, ‘메’가 과거에는 ‘들판’을 뜻했고, 혹은 ‘들판에서 나는 식물’ 또는 ‘곡식’을 뜻했다는 것과 ‘쌀’의 고어로도 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쌀로 지은 밥을 ‘메’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제사상을 차릴 때만 변함없이 굳어져 사용된 것이다. 지금도 쓰고 있는 ‘멥쌀’이라는 말도 물론 ‘메’와 관련이 있다. 이처럼 단어 하나를 알아 가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거기다 특정 지역에서 쓰는 사투리 하나에 역사적 사건이 얽혀 있는 것도 발견하게 된다. 전라도 방언에서 나물을 뜻하는 말은 ‘노물’과 ‘너물’이 있고, ‘심다’를 뜻하는 말로는 ‘슁기다’, ‘숭구다’, ‘싱기다’ 등이 있다. 이 중 ‘너물’이나 ‘숭구다’ 등은 전라도 동부지역 방언인데, 내가 살던 곳(전남 장흥)은 전남 서남부인데, ‘너물’이나 ‘숭구다’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어떻게 전라도 서남부에서 전남 동부 방언이 쓰이는 걸까? 이는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너물’이나 ‘숭구다’ 등의 말이 장흥 전체가 아니라 장흥의 장동, 장평, 유치 등에서만 그렇게 통용된다는 것은, 그 지역만 동부 방언의 영향을 받았던 결과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동부 방언의 영향을 받았을 사건을 떠올려보니, 바로 여순 사건이었다. 여순 사건이 일어난 뒤 그 주력 부대 하나가 장흥 장동과 장평을 거쳐 유치면으로 들어왔다. 역사적 사건의 흔적이 언어로 남은 것이다. 이렇게 단어 하나에도 사연이 있고,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방언에 더욱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방언을 공부하고, 전라도 방언을 시로 쓰면서부터 나는 시인이 되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점을 실감했다. 하나의 언어 체계를 갖춘 방언을 안다는 것은, 사전 하나를 더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찌되었건 표준어로 이루어진 한 권의 사전을 가지게 되었고, 거기에다가 전라도 방언이라는 사전을 한 권 더 가진 셈이니, 표준어만 배우고 익힌 사람들에 비해 더 풍부한 어휘력을 확보한 것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서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고 보았을 때, 나는 보다 많은 어휘를 지닌 사전을 가졌으니, 당연히 사고 또한 폭넓을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그렇게 전라도 방언으로 시를 쓰면서 나는 비로소 시인이 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였다. 내가 썼던 말, 내 어머니에게서 배운 말을 시로 쓰는 게 진정한 시인이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였는데, 그 꿈을 이룬 것이 아닌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방언과 표준어가 따로 있었기에 나는 보다 풍부한 사고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언어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표준어와 방언의 다름에 있고, 그러한 다름과 유사성 덕분에 내 언어의 바다는 더 깊고 넓어진다. 인간은 언어를 만들었고, 그 언어를 통해 사고한다. 우리가 다채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것도 언어 덕분이다. 특히 내가 쓰고 있는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다른 언어와 비교할 수 없다. 한 예로 사물의 형태를 드러내는 형용사의 풍부함을 다른 언어에 비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러한 것은 편견에 불과할 수도 있다. 자기 언어를 많이 아는 만큼 그 언어의 다채로움을 실감할 수 있다. 전라도에서 태어난 나는 경상도 방언이나 제주도 방언으로 시를 쓰는 게 무척 어렵고, 대개는 막혀서 완성하지 못한다. 공부를 통해 익힌 언어라는 그 한계가 분명한 것이다. 따라서 내가 시로 쓸 수 있는 한국어는 표준어와 전라도 방언이다. 그 말들은 세세한 쓰임까지 정확히 알고 있으니, 시어로 활용 가능하다. 나는 시를 쓰면서 모어의 아름다움에 대해 경이함을 느낀다.

그러나 한국어의 아름다움은 서울 방언이나 전라도 방언에 국한되지 않는다. 제주 방언도 아름답고 경상도 방언이나 평안도 방언도 아름답다. 산 하나 넘으면 달라지는 몇 개의 단어들을 발견하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던 식물을 발견한 식물학자의 심정과 같이 즐거운 일이다. 이 풀과 저 풀이 다르고, 이 나무와 저 나무가 다르듯이 그렇게 분화된 말은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 그곳에 또 한 세계를 완전하게 이룬다. 이렇게 말의 아름다움은 자연의 그것과 같아서 한국어가 아름답듯이 일본어도 아름답고, 중국어도 아름답고, 티베트어나 베트남어도 아름답다. 러시아어나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도 아름답다. 그리고 말이라는 그릇에 담긴 그곳 사람들의 생각도 아름답다. 세상에는 내가 아는 말보다는 내가 모르는 말이 더 많다. 이러한 말의 풍요로움은 지구상 생명체의 다양성만큼이나 눈물겹게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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