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재역 벽에 벽서가 붙는다면 어떤 내용일까
엊그제 버힌 솔이 낙락장송 아니런가
적은덧 두던들 동량재棟樑材 되리러니
어즈버 명당이 기울면 어느 남기 버티랴.
(엊그제 벤 소나무, 가지 축 늘어진 큰 소나무 아닌가
그대로 두었던들 대들보감 되었을 텐데
어즈버 조정이 기울면 어느 나무가 버티랴)
김인후(金麟厚, 1510〜1560)는 조선조 중종 때 태어나 명종 때 죽은 문신이다. 정미사화丁未士禍 때 억울하게 죽은 부제학 임형수를 애도하며 이 시조를 썼다. 정미사화는 1547년(명종 2년)에 일어난 사화士禍로, 일명 양재역 벽서 사건이라고 한다. 을사사화의 뒤치다꺼리 격으로 당시의 권력자 윤원형이 이끄는 소윤이 대윤 일파의 잔당을 숙청한 사건이다.
사건은 1547년 9월에 경기도 과천현 양재역에서 부제학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 이로李櫓가 붉은 글씨로 쓰인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명종에게 올린 데서 시작된다. 벽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중추월 그믐날.”
여주는 문정왕후다.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동생이자 실권자였던 윤원형은 “을사년 당시에 재앙의 근원들을 다 뿌리 뽑지 못한 데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지금이라도 발본색원해야 합니다.” 하고 주장하여 또다시 사람들을 대거 처형한다. 지금의 당쟁은 사람들을 감옥에 가게 하지만 그 당시의 당쟁은 피바람을 몰고 왔다.
대윤에 속했던 임형수는 소윤의 우두머리 윤원형의 미움을 받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을사사화로 파직되었다. 그 뒤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대윤파 윤임의 일파로 몰려 유배된 뒤에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다.
김인후는 윤원형(尹元衡, 1503〜1565)이 멀쩡히 살아 있을 때 이 시조를 썼다. 만약 이 시조가 윤원형의 손에 들어갔더라면 그도 목숨을 보전치 못했을 것이다. 현재 이 땅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두 당 사이의 설전을 보면 이 시조가 생각난다. 인터넷 뉴스 댓글들을 보면 양재역 벽서 같다. 80년대에는 대학가에 대자보가 붙곤 했었는데 인터넷 시대가 되어서 그런지 벽서, 즉 대자보는 잘 안 보인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향일성의 시조 시학』,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인산시조평론상, 유심작품상,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