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교과서에 실려야 할 옛 시조 30편(23)-자연을 벗삼아 근심 없이 살고파라
이승하 시인의 교과서에 실려야 할 옛 시조 30편(23)-자연을 벗삼아 근심 없이 살고파라
  • 이승하
  • 승인 2022.12.2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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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송희 에디터

자연을 벗삼아 근심 없이 살고파라

 

말 업슨 청산靑山이요 태 업슨 유수로다

갑 업슨 청풍淸風이요 임자 업슨 명월이라

이 중에 병 업슨 이 몸이 분별 업시 늙으리라

 

(말 없는 청산이요 자태 없는 유수로다

값이 없는 맑은 바람이요 임자 없는 명월이라

이 중에 병 없는 이 몸이 근심 없이 늙으리라)

 

이 시조를 쓴 이는 성혼(成渾, 15351598)으로, 이황ㆍ이이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거유로 일컬어지는 대단한 학자다. 친구 이이의 추천으로 벼슬길로 나갔지만 이이와 학문적인 면에서는 다른 면을 보였다. 특히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한 왕복 서신에서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였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이같이 대립했지만 이이의 사후에 율곡집栗谷集을 저술하였다.

정여립의 난으로 인해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성혼은 기축옥사에 연루되었기에 북인들에 의해 삭탈 관직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후에 1633년 복권, 이조판서 자신의 원래의 벼슬로 복귀하였다. 서인의 영수로서 정철과 함께 정계를 이끌었다. 정계 은퇴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금 정계에 복귀했으나 동인 강경파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당했다.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 이이와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으나 남인이 집권한 기사환국 때 출향을 당했고 서인이 재집권한 갑술환국甲戌換局 때 다시 문묘에 배향되었다. 훗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질 때 소론에 속하는 사대부들은 대부분 성혼의 이론을 지지했기에 소론의 시조 격으로 본다.

이 시조는 정계 은퇴 후 낙향해 있으면서 쓴 것이다. 한평생 학문을 연구하고 벼슬을 했지만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다. 당쟁의 회오리바람을 맞으며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헤맨 한 생애였다. 그래서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 파주에 와 있으니 비로소 자연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은 내 몸에 병도 없으니 분별(한글 분별은 근심, 걱정, 시름 같은 뜻이다) 없이 늙어갈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당파싸움에 질려서 쓴 성혼의 이런 시조를 이 나라 국회의원들이 봤으면 좋겠다.

 

사진=이승하시인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향일성의 시조 시학』,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인산시조평론상, 유심작품상,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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