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교과서에 실려야 할 옛 시조 30편(26)-봄에는 우리 모두 부지런해져야 한다
이승하 시인의 교과서에 실려야 할 옛 시조 30편(26)-봄에는 우리 모두 부지런해져야 한다
  • 이승하
  • 승인 2022.12.2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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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송희 에디터
사진=한송희 에디터

봄에는 우리 모두 부지런해져야 한다

 

동창이 ᄇᆞᆯ갓ᄂᆞ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쇼칠 아해ᄂᆞᆫ 여태 아니 니럿ᄂᆞ냐

재 너머 ᄉᆞ래 긴 밧츨 언제 갈려 ᄒᆞᄂᆞ니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짖는다

소 쳐야 할 아이는 여태 안 일어났느냐

재 너머 이랑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귀농한 사람이라면 이 시조가 실감 날 것이다.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시조가 청구영언에 실려 있지 않으면 남구만은 내게 구만 리 저 바깥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봄이 되었으니 우리 모두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는 새마을운동 같은 시조를 썼기에 나의 뇌리에 일찍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조의 양반이라고 하면 당리당략을 위한 파벌싸움에 나서고, 헛된 공리공론을 일삼는 비현실적인 인물로 생각하기 쉽다. 남구만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영남에 어사로 나가 흉년에 백성을 보살피는 진휼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안변부사와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했다.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척박한 그곳에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변경 수비를 튼튼히 했다. 숙종 초 대사성과 형조판서를 거쳐 1679(숙종 5) 좌윤이 되었다.

같은 해 남인 윤휴尹鑴·허견許堅 등의 방자함을 탄핵하다가 남해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소생, 도승지ㆍ부제학ㆍ대사간 등을 역임했으며, 숙종 때 두 차례 대제학에 올랐다. 병조판서가 되어 폐지한 사군四郡의 재설치를 주장해 무창茂昌과 자성慈城 2군을 설치했으며, 군정軍政의 어지러움을 많이 개선했다. 숙종 때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다 해보았다.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1701(숙종 27) 장희빈의 처벌에 대해 중형을 주장하는 김춘택金春澤, 한중혁韓重爀 등 노론의 주장에 맞서 경형輕刑을 주장하다가 숙종이 장희빈의 사사賜死를 결정하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그 뒤에도 벼슬 오르기와 쫓겨나기 등의 파란을 겪다가 1707(숙종 33)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고향에 와보니 다들 만사가 태평이다. 빨리 쟁기질을 하고 모심기를 해야 하는데 모두 천천히, 여유롭게 한다. 속전속결로 일 처리를 하던 버릇이 남아 있어 이런 시를 썼지만 전원생활을 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시골 사람들을 잘 사귀는 것이다. 일꾼들을 재촉하면 될 일도 안 된다. 귀농한 사람들한테서 들은 이야기다.

 

사진=이승하시인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향일성의 시조 시학』,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인산시조평론상, 유심작품상,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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