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친구는 물ㆍ돌ㆍ소나무ㆍ대나무ㆍ달 다섯이란다
내 버디 몃치나 ᄒᆞ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의 ᄃᆞᆯ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ᄉᆞᆺ밧긔 또 더ᄒᆞ야 머엇ᄒᆞ리
(내 벗이 몇이냐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것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외에 또 더해서 무엇하리)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산중신곡山中新曲」 18수 중 하나다. 18수 중에서 여섯 편을 따로 떼어 「오우가五友歌」라고 하고 이 시조는 그중에 「서사序詞」다.
효종의 스승이었던 윤선도는 남인의 거두로서 수학기를 제외한 생의 대부분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유배지라는 곳은 대개 연고도 없고 척박한 곳이다. 먹을 것이 변변치 않고 생활이 곤궁하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데 언제쯤 이 유배 생활이 끝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유배시’요 ‘유배문학’이다. 경남 남해에 왜 ‘유배문학관’이 세워졌겠는가. 이곳에는 남해로 유배 온 김구ㆍ남구만ㆍ김만중ㆍ이이염ㆍ류의양ㆍ김용의 생애와 그들의 문학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한편 완도군 보길면에 가면 윤선도문학관이 세워져 있다.
윤선도는 서울 사람이다. 한성부 동부 연화방이란 데서 태어났는데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쯤이다. 윤선도는 유배 생활을 했기 때문에 35수의 시조와 40수의 「어부사시사」를 쓸 수 있었다. 윤선도가 유배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서당을 열어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과 시조를 쓰는 것, 두 가지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살았다면 물과 돌을, 소나무와 대나무를, 달을 친구로 삼았고 더 이상의 친구는 필요없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배지에서도 마음 맞는 선비를 만날 수 있었겠지만 그럴 확률은 높지 않다. 외로운 심사를 달래주는 것은 어떤 날은 물이고 어떤 날은 바위다. 큰 바위에 앉아 있거나 조약돌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름을 잊을 수 있다. 소나무는 휘어져 있고 대나무는 쭉쭉 뻗어 있다. 소나무처럼 살 것을 대나무처럼 살다가 여기에 와 있나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밤이면 나타나는 친구가 달이다. 이 다섯의 벗이면 족하다,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윤선도는 말한다. 억설인 것 같지만 그랬을 법도 하다. 한양, 대궐, 권력, 당파, 상소 등을 생각하며 골치가 아픈데 유배지에서는 이들 다섯 벗과 살아가니 남부러울 것이 없다. 56세 때 유배지 해남 금쇄동에서 쓴 「산중신곡」은 우리 시조 중에서도 주옥편이다. 정철의 가사, 정약용의 저작, 윤선도의 시조, 김정희의 추사체가 왜 나왔을까를 생각해보면 유배는 우리 문학을 위해서는 참 고마운 벌칙이었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향일성의 시조 시학』,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인산시조평론상, 유심작품상,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