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부터 남다른 일본의 중고책 사랑...한국과 뭐가 다른가?

대한민국 중고책 시장은 침체기에 있다.
서울의 미래유산이라는 청계천 헌책방거리는 이미 3년 전부터 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손님들의 발걸음이 뜸해졌고, 부산의 보수동 책방골목에서는 지난 2020년 서점 8곳이 한꺼번에 폐점할 정도로 사정이 좋지 않다. 광주광역시 계림동의 헌책방거리는 남아있는 서점이 몇 없어 ‘거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다.
그나마 남아있는 중고서점들조차도, 알라딘이라는 프랜차이즈 유통망을 통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알라딘 역시 고서적(古書籍)을 유통하는 것이 아닌, 도서정가제를 우회해 거의 새 책을 중고라는 이름으로 팔고 있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중고책 시장은 ‘침체’를 넘어 아예 ‘몰락’이란 말이 어울릴 지경에 다다랐다. 그렇다면, 독서의 왕국이라는 일본의 상황은 어떠할까?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12월 10일 토요일, 필자는 진보초(神保町)에 위치한 고서점거리를 탐방하고 돌아왔다.

모리 오가이 기념관(1부 참조)이 있는 센다기역에서 진보초까지는 한 번 환승을 하고도 15분이 채 되지 않았다. 진보초 역 A1번 출구에서부터 마치 ‘여기가 고서점거리입니다’ 라고 말하는 듯한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필자는 센슈대학 방향 A2번 출구를 택했다. A1번으로 나가면 바로 고서점 거리로 나갈 수 있었지만, 걷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계단을 이용했다. 잠시 진보초 주변을 둘러보고싶어서였다.
센다이마에(專大前) 사거리로 나오자, 거대한 쇼난(城南) 은행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필자가 주목한 것은 바로 그 뒤에 있는 건물이었다. 일본 최대의 출판사, 슈에이샤(集英社)였다.
![일본 최대의 출판사 코단샤 사옥[사진촬영=박민호]](/news/photo/202212/77496_51625_1849.jpg)
한국에서는 간혹 ‘집영사’라고도 불리는 슈에이샤는, 프랑스 출판 전문지 <Libres Hebro>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 50대 출판사(Global 50 The Ranking of the Publishing Industry)’에 항상 선정된다.
슈에이샤는 지난 2021년, 연매출 12억 5백만 유로(1조 6339억원 가량)를 달성해 세계랭킹 14위에 올랐다. 이는 일본에서는 1위, 아시아에서는 2위에 해당한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교원그룹이 1조 3857억원을 달성해 세계랭킹 17위에 있다.
잠시 슈에이샤 사옥을 둘러본 뒤, 이번에야말로 고서적 거리로 다시 돌아왔다.

칸다 고서점 거리(神田古書店街)는 그 명성대로 인파가 활발했다. 토요일 오후 4시경이었음에도, 고서점을 들락거리며 책을 사가는 손님들이 제법 많았다. 그것도 지가가 높을 것으로 유추되는 대로변 한복판에 줄줄이 세워져 있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고서점마다 판매하는 책의 종류가 다른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어떤 서점은 교양서적을 전문으로 팔고, 어떤 서점은 만화나 소설 위주로, 어떤 서점은 흘러간 옛 음반이나 잡지들을 수집해 비싼 가격으로 되팔기도 했다.
이 중에서 필자의 눈을 잡아 끌었던 서점은 이름 그대로 완전한 ‘고서(古書)’를 팔던 나카가와 책방(中川書房) 이었다. 이곳의 유리 진열대에 놓여 있는 책들은 척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았고, 가격도 한화 55만원에서 200만원 까지 할 정도로 꽤나 높았다.
![나카가와 책방(中川書房)에 진열된 고서적[사진촬영=박민호]](/news/photo/202212/77496_51632_300.png)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진 가운데 놓여진 ‘쇼몬 이치야 쿠쥬’(蕉門一夜口授)라는 책은, 에도시대의 저술가 호리이 바쿠스이(堀麦水)가 안에이 3년(1782년)에 저술한, 무려 200년도 더 넘은 책이었다.
그 밑에 있는 것은 더욱 가격이 비쌌는데, 1972년부터 1989년까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이케나미 쇼타로(池波正太郞)의 원작으로 만든 시대극, 「검객상매(剣客商売, 의역 : 검객들의 객잔)」의 진품 대본이 무려 385만엔이라는 가격으로 팔리고 있었다.
그러나 필자를 더욱 놀라게 했던 가게는 따로 있었다. 바로 타카야마 서점(高山本店) 이었다.

[사진촬영=박민호]
타카야마 서점은 무려 메이지 8년, 즉 1875년에 개점하여 150년 가까운 세월동안 운영되어 온 진보초 최고(最古)의 고서점이다. 본래 후쿠오카 현 구루메 시에 개점하였던 타카야마 서점은, 메이지 유신 이후 개항이 본격화된 메이지 30년 무렵(1900년대)부터 진보쵸로 옮겨왔다고 한다.
그만큼 타카야마 서점은 진보초 고서점 거리의 역사와 함께 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심지어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일본의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 역시 이 타카야마 서점을 이용했다고 한다.
현 타카야마 서점의 점주 타카야마 하지메(高山肇)씨는 4대째 가업을 이어받고 있으니, 증조부 때부터 가게를 운영해온 셈이다.
필자는 타카야마 씨에게 인터뷰를 신청하고 싶었으나, 하필이면 그가 자리에 없는 데다가, 점원으로부터 “미리 약속한 날이 아니면 인터뷰가 어렵다”라는 대답을 듣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진보초 고서적 거리의 기원은 메이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항 이후, 일본을 근대화시키고자 했던 관료들은 교육 개혁에 가장 먼저 착수했다. 그 시절 진보초 근처에는 수많은 공립 교육기관이 생겨났는데, 도쿄대학의 전신인 도쿄 카이세이 학교(東京開成學校), 메이지 법률학교(明治法律学校, 현 메이지대학), 센슈학교(専修学校, 현 센슈대학)등이 그것이다.

에도시대에는 외국의 문물을 연구하던 기관이었으나, 1870년 메이지 유신 이후 공립학교로 거듭났다.[출처=위키백과]
많은 대학교가 있는 요충지에 서점가가 생겨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는 현재까지도 니혼대학, 도쿄전기대학 등 근처의 많은 대학교와 그 학생들의 발걸음에 힘입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진보초 거리를 돌아다니던 중, 한 포스터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그것은 도코로자와(所沢) 중고책 축제의 포스터 앞이었다.

도코로자와 중고책 축제의 테마는 ‘일본의 역사(가마쿠라 시대~에도시대)’였고, 입장도 무료였다. 하지만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이 축제가 무려 104회나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도코로자와 중고책 축제는 연 4회가량 열리는 축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뎐 2020년과 2021년에는 개최하지 못했으니, 적어도 25년은 넘었다는 셈이다. 연 4회나 개최되었다는 점도 놀라웠지만, 그 긴 세월동안 이어져 왔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필자는 이 축제에 가볼 수 없었다. 도코로자와 역은 도쿄가 아닌 사이타마에 있었기 때문이다. 도쿄 시내에서 사이타마까지는 대략 서울에서 평택까지의 거리였고, 그곳으로 가기엔 이미 짜여진 일정이 빠듯했다. 때문에 필자는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 진보쵸 고서적 거리(칸다진보쵸)는 진보초역 A1번 혹은 A2번 출구와 바로 연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