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76) / 윤동주가 최후에 한 말이? – 이승하의 ‘잃어버린 성을 찾아서’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76) / 윤동주가 최후에 한 말이? – 이승하의 ‘잃어버린 성을 찾아서’
  • 이승하
  • 승인 2023.03.17 17:51
  • 댓글 1
  • 조회수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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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송희 에디터
사진=한송희 에디터

잃어버린 성을 찾아서

이승하


창씨는 해도 개명은 하지 않았다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
일본 본토에 가 공부한다는 것이 그다지 욕된 일이었을까
성씨를 고쳐 신고한 날 1942년 1월 29일
그 닷새 전에 시를 썼지 「참회록」을
여백에 낙서할 때의 기분이 어땠을까
―시인의 고백, 도항증명, 힘, 생존, 생명, 문학, 시란? 不知道, 古鏡, 비애 금물

조상을 부정하라고 한다 
히라누마 도오쥬우!
하이!
매일 매시간 일본 교수가 출석부 보며 부른 낯선 성
대답할 때마다 떨리는 입술
육첩방은 남의 나라 내 나라가 아닌데
시를 썼기에 요시찰인물
시를 썼기에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16분
후쿠오카 형무소 캄캄한 독방에서
크게 한 번 외치고 쓰러져 죽었다
윤—동—주—!

ㅡ『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 개정판(서연비람, 2023)에서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일본인 교도관이 한밤중인 3시경에 아주 큰 외마디 비명을 들었다고 했다. 사상범인 윤동주가 갇혀 있는 독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벌떡 일어나 달려가 자물쇠를 따고 들어가 보았더니 동주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숨이 막 끊어진 상태였다. 그저 아아— 하고 비명을 질렀을까? 내 추리력으로는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쳐 부르고 죽었을 것 같았다. 왜? 일본에서의 그의 이름은 윤동주가 아니라 히라누마 도오쥬우였기 때문이다.

 관부연락선을 타려면 도항증을 끊어야 하는데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배에 태워주지 않았다. 이름은 ‘東柱’로 그대로 썼고 성은 어쩔 수 없이 ‘平沼’로 바꿨다. 친구들은 그를 동주라고 불렀지만 일본인들은 그를 ‘히라누마 도오쥬우’라고 불렀다. 도쿄의 릿교대학 교수들도, 교토의 도시샤대학 교수들도 출석부를 보고 출석을 부를 때 ‘히라누마 도오쥬우!’라고 불렀다. 윤동주는 ‘하이!’ 하고 대답하며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비애, 모국어를 빼앗긴 비애, 성씨를 빼앗긴 비애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쉽게 씌여진 시」를 보면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대학 노트를 끼고/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란 구절이 보인다. 수감된 이후에는 수번(囚番)으로 불렸겠지만 재판 과정에서도 일본식 이름을 지겹도록 들었을 것이다. 히라누마 도오쥬우! 하이! 목숨이 다한 그날, 윤동주는 하늘 우러러 외쳐 부르지 않았을까. 윤—동—주—!라고. 이 시를 쓰고 나서 나는 한참 동안 울었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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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in Pyo 2023-03-19 19:21:17
끝에
사링해요, 윤동주

이렇게 써야지요